
“주일을 거룩히 지내려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우리가 고해성사를 보러 가는 주된 이유가 십계명의 제3계명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하는 이 계명이 실은 노동과 휴식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주일을 거룩히 지낼 수 있을지 오늘 ‘생각의자’에 앉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출처: Photo by Tim Mossholder on Unsplash>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계명을 주신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렛날에 쉬시며 그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십계명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쉽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주인도 쉬고 종도 쉬었습니다. 이방인도 쉬고 심지어 가축들에게도 이날에는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만일 계명으로 단단히 못 박지 않았다면, 안식일에 주인은 쉴 수 있지만 종들은 일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노동시간을 법적으로 정해서 노동자들이 주일에는 쉴 수 있도록 하는 법률적 제도 안에는 이러한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출기 3장 22절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헤맬 때, 하느님께서 그날그날 필요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엿샛날에는 양식을 두 배로 내려주시면서 안식일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무조건 쉬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쉴 수 있는 조건을 먼저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의 깊은 안배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최저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배려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처: Photo by Debby Hudson on Unsplash>
둘째로 어떻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지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 안에 머물며 쉰다는 점에 있어서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맥을 같이 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은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며 한 주간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받습니다. 하지만 주일이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쉬고 싶은 마음도 커져서 주일미사를 건너뛰고 싶은 유혹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예전에 사제들의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부모님 뵈러 얼마나 자주 가세요?” 저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밖에 못 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그 정도면 자주 가시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제들이 생각보다 부모님 댁에 자주 가지 못합니다. 월요일에 쉬고 싶은 마음이 크고, 또 해야 할 일들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부모님 댁에 가서 엄마가 해 주시는 집밥을 먹으면 몸도 마음도 힘이 나며, 오길 참 잘했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아들신부님, 우리는 괜찮으니 신자들에게 잘해 주세요.”라는 말씀을 들으면, 신자들을 더욱 사랑하며 사목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힘을 느낍니다.

<출처: Photo by Kenny Krosky on Unsplash>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며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은 집에 와서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가라는 부모님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마음으로 방문을 하지만, 뵙고 나면 더 큰 사랑과 은총을 받고 옵니다. 이처럼 우리가 계명을 지켜서 하느님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성당에 가지만 더 큰 은총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가득히 담아 주십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기 위해서 사회적으로는 적절한 노동시간과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어야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집밥을 차려주시는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주일 미사에 오시는 신자들을 아버지의 마음으로 환대하고, 집밥을 지어주시는 엄마의 마음으로 성체성사를 정성껏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최요안 세례자요한 신부
서울대교구 성소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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