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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정의 문헌] 공동선과 전체선
    • 등록일 2021-12-24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318
  • [노동과 불로 소득]


    공동선과 전체선


       오늘날 정치에서는 어쩌다 가끔 언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정당들이 추진하는 계획들에서 공동선은 거의 사라져 버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세상의 상처들을 완전히 치유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많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는 선거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소수의 부동층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럴싸하고 적당한 입법안을 발표하고 말아 버리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공동선'에 대하여 그다지 많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공동선은 사실 이미 1900년대 초에 위기에 놓인 범주입니다. 사회를 몸으로, 집단으로 보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었고, 이러한 개념에 따르면 공동의 이익이 개인이든 단체든 순전히 개별적인 이익보다 우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찬미받으소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불의가 판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배척당하며 기본권을 박탈당하는 세계화된 사회라는 현재 상황에서, 공동선의 원리는 곧바로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로 연대와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이익이 지배적일 때, 공동선의 올바른 사회적 결속을 상기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공동선과 공동선의 논리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공동선의 증진을 위하여 필요한 행동들이 줄어든 것입니까? 왜 어쩌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내린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잊어버린 것입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동선을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또한 공동선이 정치 권위의 존재 이유라는 사실과 여러 분야의 서로 다른 이익들이 조화되도록 정치 권위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도대체 왜 잊어버린 것입니까?


       공동선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회를 평화로운 한 양 떼가 아니라, 양들뿐만 아니라 양들을 위협하는 늑대들도 있는 하나의 골짜기로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선을 어떻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굶주린 늑대와 살아남아야 하는 어린양의 극명히 대립되는 요구를 어떻게 다 함께 충족시킬 수 있습니까? 공동선은 부자와 투기꾼과 불로 소득자들로 이루어진 10퍼센트가 독차지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 달을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와 농부 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이들의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 개인의 단순 계약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되는 강한 사회적 유대나 진정한 사회적 합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공동선에 대하여 앞서 말한 모든 설명은, 사회적 유대가 늘 중시되는 사회를 다시 한번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납세의 필요성을 강조하려 합니다. 우리가 한 사회체(社會體)를 이루고 있다면, 세금 납부는 강탈이 아니라 유기체가 계속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체선' 만큼 '공동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 차마니(Zamagni)가 밝힌 대로, ‘공동선’이 합의와 연관된다면, ‘전체선’은 계약과 연관됩니다. 실제로 전체선은 공동선에서처럼 두 값의 곱이 아니라, 두 값의 단순 합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0을 벌고 다른 사람이 1,000을 벌었다고 칩시다. 공동선에 따르면 사회는 0을 번 것입니다(1,000×0=0). 반면에, 총합을 따지는 전체선에 따르면, 사회는 어쨌든 1,000을 번 것입니다(1,000+0=1,000). 전체선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들은, 개개인이 맺은 무수한 계약들을 합산하고는 겉보기에 성공적인 노동 정책이 도입되었다는 환상을 심어 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바로 여기에, 버리는 문화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지 않고도 0은 1,000 옆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공동선이 경제적 이익의 중심에 있다면, 가장 힘없는 이들을 더 이상 사회에서 배척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전체선에서 그러듯 전체 함수의 계수로서 이 값을 지닌다면, 공동선에서는 전체 함수의 결과가 0이 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전체선의 이러한 논리가 현재 만연해 있습니다. 새로운 버림이 있을 때마다 이 논리로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0이나 마이너스의 숫자를 가지고 있어도 방정식에서 그 숫자들을 빼고 계산하면, 전체선은 같거나 더 많은 결과치를 얻게 됩니다. 반면에 공동선의 논리에서 그처럼 억지로 숫자들을 버리고 나서 이루어지는 계산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몸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한 손가락이 아프다고 정작 그 손가락을 잘라 내지는 않습니다. 인체의 기본적인 기관 하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 손가락을 치료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손가락이 썩어 가고 있지 않는 한, 그 손가락을 절단하기보다는 치료하려고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이 난관에 부딪히고 적자 예산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가 병들었을 때, 그 병든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해결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기존 체계 안에 더 잘 적응하도록 배려하여 모든 이에 게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다.



  • 링크
    http://www.nodongsam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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