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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milia 2019-05]2019월 4월 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강론
    • 등록일 2019-04-15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70
  • 20194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강론

     

    - 참된 사랑의 실천 -

     

    이주형 세례자 요한 신부(노동사목위원장)

          

    “4세기 말의 에테리아 순례기(Peregrinatio Etheriae)에 의하면 예수 부활 대축일 이전의 주일에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음을 기념하기 위해 오후에 올리브 동산에 모여 말씀 전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오후 5시경 복음을 읽은 후 나귀를 탄 주교와 더불어 신자들이 올리브 가지나 종려 가지를 들고 예수가 처형당한 장소에 세워진 부활 성당으로 행렬을 한 다음 저녁에는 함께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가톨릭 대사전,

    "주님 수난 성지주일(Dominica in Palmis de Passione Domini)"

     

    교회는 거룩한 전통에 따라 오늘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전례를 거행합니다. 주 그리스도의 수난을 바라보는 가운데 정성껏 기도를 바치며 그 사랑의 행진에 참여할 것을 교우들에게 권고합니다. 600년이 되어서야 서방교회가 성지주일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성대한 행진과 함께 장엄한 전례를 봉헌하였으나 오늘 전례의 본질은 십자가에서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수난하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더욱이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셨음은 세상이 보기에도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분의 수난을 가엾은 마음으로 동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신 그분처럼 나도 내 삶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심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은 한 목소리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마르 8,34; 루카 9,23)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요한복음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참된 사랑이며(요한 15,13) 착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 참된 주님께서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전합니다(요한 10,11.15.17).

     

    그러나 고통과 수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순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웅적 행적이나 피를 흘리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합니다. 호기롭게 나는 자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당장 내가 겪는 삶의 어려움들도 우리의 믿음을 위협합니다. 어렵고 힘든 때 성당을 찾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성당을 등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수난은 신비로운 열매를 갖고 있습니다. 당장의 어려움은 우리를 약하게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며, 우리로 하여금 참된 것을 보게 하고 얻게 하며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가톨릭 신앙은 고통의 신비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고통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은 없지만 고통의 체험은 이론과 교리를 넘어서는 사랑의 신비로 우리를 이끈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장례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아는 선배 신부님의 모친이 돌아가셨고 수십 년을 투병하신 고인의 마지막 영결미사였는데 가족들이 진심으로 고인을 돌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족들이 겪은 현실적인 어려움은 참으로 마음 아팠습니다. 병마와 싸우는 본인의 고통과 미안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의 시련도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족은 그 어려운 시기를 통해 사랑의 신비를 체험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고통과 수난은 아프고 힘들지만 삶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영원한 섭리로 이끌어줍니다.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이 함께했던 영결미사를 진실로 거룩하게 해 주고 천국의 장엄함을 드러내 준 것은 바로 그 가족이 체험한 참된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가운데에서 특별히 천주교에 더 많은 호감을 갖습니다. 성당의 장엄한 전례, 교우들의 겸손하고 따스한 모습 그리고 독신으로 살아가시는 수녀님들과 신부님들의 거룩한 모습들도 그 이유에 한몫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천주교가 사회적인 공신력과 신임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 애쓰는 종교 본연의 모습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고 현장에서 함께 연대하고 손을 잡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바치는 참된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을 보내며

    부족한 저의 믿음에 다시금 성령의 불꽃이 내리길 청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고통과 좌절로 상처를 입은 내 마음에

    희망의 작은 싹이 솟아나길 소망합니다.

    나는 비록 세상의 거대한 악()과 싸울 커다란 용기는 없지만

    내 가장 가까운 이웃의 눈물을 닦아줄 작은 용기가 내 안에서 일어서길 청합니다.

    사랑이시며 좋으신 참된 우리 주님께 청합니다.

    요한 1서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요한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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