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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자에 앉아

노동사목위원회

생각의자에 앉아

 

‘나에게 노동은 무엇인가?’ <생각 의자>에 앉아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노동이 기도가 될 수 있을까?”
“노동이 신앙고백이 될 수 있을까?”
“노동이 구원의 여정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과연 사람들과 나 자신은 ‘기도로, 신앙고백으로, 구원의 여정’으로 자기 노동의 가치를 살고 있을까?’ 이러한 물음으로 <생각 의자>는 계속 생각을 이어가게 합니다.

 

“노동 현장에서 과로와 저임금에 시달리며 일하는 사람들이, 기도로, 신앙고백으로, 구원의 여정이라는 의미로 노동의 가치를 깨달으며 일할 수 있을까?”
“인간의 노동이 생존을 위한 보수를 받을 목적으로 제공된 노력으로만 인식된다면, 과연 노동을 통해 인간은 ‘인격적인’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을까?”
“누군가를 ‘인격적’이라고 한다면, 노동의 요소는 빼고 그를 ‘인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노동이 ‘인격적인 자기완성’에 이르는 ‘인격적인 노동’이 되고, 노동으로 인격적인 완성을 이루는 ‘노동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표현이지만,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과정의 일’입니다.

 

구원의 여정이며 자기완성에 이르는 <인격적인 노동>

 

노동이 ‘인격적’이라면 그 노동을 통해 ‘자기다움’이 드러나야 하고, ‘자기다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다움’이 드러나지 않고 ‘자기다움’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격적’일 수 없고, 노동 역시 인격적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가 하는 ‘노동/일’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 가치가 드러납니다. 또한 그 ‘노동/일’을 한 사람 때문에 그 ‘노동/일’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사람들의 노동은 생산하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것이며, 봉사하고 가르치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동을 통해 사람은 ‘자기다움’을 얻습니다.

 

또한 노동이 ‘인격적’이라면 그 노동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연결하지 않거나 연결을 방해하는 노동이라면 ‘인격적인 노동’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사람은 반드시 사회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관계 안에서 ‘인격적인 노동’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함으로써 격려와 지지를 통해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공동의 목표’을 성취하는 사회적 연대를 이룹니다.

 

그리고 노동이 ‘인격적’이라면 그 노동은 ‘선을 지향하는 결과’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기답고, 연대하더라도 ‘선을 지향하는 결과’가 아니라 악한 결과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런 노동을 ‘인격적인 노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노동’은 ‘선한 목표’를 이루어 발전시키며, 인간 존재와 사회를 가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인 노동’은 자기답게 하고, 서로 연대하며, 선을 이룸으로써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서 자기완성, 곧 신앙의 표현으로 구원에 이르는 여정이 됩니다.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다시 <생각 의자>에 앉아

 

저임금, 과로사,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작업환경, 임금 투쟁, 노사갈등 등, 무수히 많은 노동 문제가 매일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습니다. 인격적인 노동의 가치는 보이지 않고, 이익과 욕심만 주장하는 갈등만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인간의 노동이 은총’이 될 수 있을까?”

 

성경은 인간 노동의 수고로움의 이유를 ‘인간 범죄의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중략)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창세 3,17-19 참조).

 

그러나 원죄 이전의 인간 노동은 수고로움이 아니라 인간의 품위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히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중략)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창세 1,28-30 참조)

 

비록 사람들은 매일매일 수고로운 노동의 현장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노동이 원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며 노동합니다. 사람들의 노동은 서로 연대하여 사회를 발전시키며 공동선을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계획에 포함된 축복이었으며 인간의 삶의 여정이었습니다. 다만 원죄의 결과인 노동의 수고로움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근본 원리였던 ‘사랑’을 잃어버린 혼돈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노동은 하느님이 보시니 좋게 창조하신 세상을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돌보고 다스리는 인간의 사명이며,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삶의 여정이자 인간 구원의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하느님다움을 파괴하는 모든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수고로운 인간 노동을 다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노동하는 은총’을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출처: united methodist insight>

 

다시 <생각 의자>에 앉습니다.

 

세상은 점점 변화하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노동의 가치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자기 노동의 가치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육체노동자’라는 표현뿐만 아니라 ‘감정 노동자’, ‘공부하는 노동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하는 ‘플랫폼 노동자’라 부르며 자기 노동의 가치를 알아차리는 희망을 봅니다. ‘노래하는 노동자’, ‘글을 쓰는 노동자’, ‘살림하는 노동자’, ‘가족을 돌보는 노동자’ 등등 모든 사람이 매일매일 자신이 행하는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는 고백이 더욱더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도록,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인간다움과 하느님의 하느님다움을 찬양하는 신앙고백이 되도록, 그리고 우리 구원의 여정이 되도록 매일의 수고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모든 비인격적인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 것을 다짐합니다.

 

양주열 베드로 신부  |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