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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학교 강사 이야기

노동사목위원회

방과후학교 강사 이야기

  
 

*이 글은 2020년에 작성되었습니다.

 

 

나는 15년 가까이 초등학교에서 공예를 가르치고 있는 방과 후 강사다. 대학 졸업 후 전공과 관련 없는 곳에서 일하다 직업병처럼 앓던 허리디스크 수술을 한 후 소위 말하는 경단녀가 되었다. 그 뒤 취미로 배웠던 종이공예를 계기로 집 근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종이접기와 북아트”를 가르친 것이 방과 후 강사로서의 첫걸음이다. 2019년까지만 해도 다양한 종류의 공예를 접할 수 있는 토탈 공예를 가르쳤다. 전공을 살릴 수 있었고 오전에 내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할 수 있는 점 등 여러 면에서 참 좋은 직업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잘하고 좋아하는 공예를 가르친다는 것이 무척 행복했다.

 

하루 80분씩 2회 수업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학교에 다니다가 5개 학교에 수업을 나가기까지 몇 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열정과 열의가 넘쳤고 천직이라는 생각으로 온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어떤 해는 토요일까지 주 6일을 수업하기도 했다. 그땐 한 분기에 200명 정도 학생을 가르쳤던 것 같다. 바쁘고 힘들었지만 감사한 시간이었고, 온전히 방과 후 학교 강사로서 탄탄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나에게 2020년은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해였다. 이런 생각들이 혹시 우울증의 시작이 아닐까 걱정도 들었다. 날이 갈수록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또 어떻게 보내지? 그냥 이대로 잠들어서 안 깨어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만 힘든 게 아닐 텐데,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주변에서 해외로 여행을 못 가 제주도만 간신히 갔다 왔다며 코로나19와 전혀 상관없다는 듯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나는 ‘저 사람들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아니면 조상 대대로 덕을 참 많이 쌓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심한 자괴감에 빠졌고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방과 후 강사를 왜 시작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 일에 후회해 본 적 없었다. 남 일처럼 생각했던, TV 뉴스에서만 보던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앗! 내가 바로 비정규직이었구나!’ 지금까지 왜 이걸 깨닫지 못했는지 주책없이 길거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고용보험 덕분에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고 한다. 그 사람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인 것 같다. 난, 그 고용보험이 없다. 고용보험이라는 게 나와는 아주 상관없는, 아주 먼 별나라 얘기인 것만 같다. 그래서 뙤약볕이 내리쬘 때도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장마에도 꼬박 일주일을 교육청 앞에서 혼자 피켓시위란 것도 해보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기로 했다. 서러움이 북받쳤다. 눈물인지 장맛비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마스크를 쓴 채 울면서 1인 시위를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자식들을 생각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정신없이 일자리를 찾았다. 새벽에 폐지라도 주우러 다녀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절실했다. 그런데 2019년 말에 이미 학교마다 2020년 계약이 다 된 상태여서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매일 알바 사이트 구직란을 보면서 밤잠을 설쳤다. 급기야 큰 물류센터 알바 자리를 몹시 어렵게 구했다. ‘그럭저럭 봄은 버티겠구나. 2학기 때는 수업을 할 수 있겠지.’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고 근육통으로 다리를 절룩거려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견뎌냈다.

 

그런데 덜컥 그 물류센터에 확진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황당하게도 자가 격리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난 확진자와 접촉한 적도 없고 일하는 시간대도 전혀 달랐는데... 억울함보다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특히 지병이 있어서 곁에서 돌봐드려야 하는 친정 부모님이 더 걱정되었다. 다행히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자가 격리를 한 이력 탓에 어디 한 군데 일을 다닐 수가 없었다. 정말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매달 고정으로 나가는 대출 원금과 이자, 카드값이며 공과금은 어쩌나 하는 생각에 밤에 잠이 안 오고 입 안이 헐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상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한 나 자신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 이러다가 나도 모르게 큰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방과 후 수업을 나갔던 학교에 방역 도우미 일을 구하게 되었다. 시급 10,300원에 주 14시간의 일이었지만 감지덕지했다. 그런데 정말 쌀값과 반찬값 쓰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오후에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지만,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코로나 때문에 수없이 망설이고 고민해야 했다. 운 좋게 지자체에서 하는 하루 8시간짜리 방역 일자리를 얻어 학교 방역일과 병행하며 간신히, 정말 간신히 연명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친정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하늘나라로 가셨다. 지병을 앓고 계셨지만 그래도 올해는 넘기고 떠나실 줄 알았다. 믿기지 않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그늘이 이렇게 큰 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꾸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나고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눈물이 났다.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란 것이 뭔지 알 것 같다.

 

2020년 3월부터 방과 후 수업이 없어 수입이 전무한 상태다. 게다가 남편 직업도 프리랜서라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몇 개월 전 카드사에서 비싼 이자를 내면서까지 대출을 받았다. 당장 몇 개월은 버티겠지만 그 후가 정말 막막하다. 2020년에만 받은 대출이 벌써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무리해서 집 장만을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경기도에 있는, 지은 지 오래된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짜리 빌라인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 하는 후회와 함께 원금과 이자를 상환 못 하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집과 직장까지 잃게 될까 봐 걱정이다.

 

“내년에는 수업할 수 있겠어?” “빨리 이직해야 하는 거 아냐?” 사람들이 말한다. 그런데도 난 계속 방과 후 강사를 하고 싶다. 나는 이 일이 참 좋다. 내가 좋아하는 공예를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아이들의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내가 정말 잘했구나, 내가 정말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저 주어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젊은 선생님들이 막강한 실력과 경력으로 치고 올라온다. 그들과 실력을 겨뤄서 수업을 못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런 상황으로 수업을 못 하게 되는 건 백번 천번 생각해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학원과 유흥가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반면에 학교의 방과 후 수업만 멈춰진 것 같다. 학교 방역일 만으로 하루에 만 보를 넘게 걷는다. 책임을 다해 일하려는 것도 있지만 학교에서 이렇게 철저하게 최선을 다해 방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등굣길에는 학생들에게 거리두기를 하라고 외치며 손 소독도 한다. 또 식당 배식 때는 멸균 장갑을 끼고 식판과 수저를 나눠주고, 거리두기를 위해 띄워 놓은 테이블과 가림막도 철저하게 소독한다. 그리고 교사들이 수업 준비로 하루 15분의 시간을 도저히 낼 수가 없다고 하여, 두 명의 방역 요원들이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각 교실을 돌아다니며 가림막 소독도 하고 있다. 구부린 채로 식당과 교실의 가림막을 닦으니 허리가 너무 아프다. 그래도 내 마음보다는 덜 아프다. 그래서 버틴다. 언제든지 얼마든지 참고 이겨낼 수 있다. 추운 날씨지만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식당과 교실 방역이 끝나면 각 층의 화장실 손잡이와 계단 난간도 닦는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방역하는데 왜 학교만 멈춰있을까? 인터넷에 검색해서 대답을 찾을 수 있다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다.

 

오늘도 철저하게 자기최면을 걸고 용기를 낸다. 내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하늘나라에서 나를 보고 계실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남은 가족을 위해 기도로써 한 평생 함께하신 우리 엄마를 위해서라도 죽을 만큼 힘들어도 견디고 버텨내야 한다고 다짐한다. 이 땅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서러움이 조금이라도 없어지는 날, 그날까지만이라도 서러움과 걱정 없이 아이들을 만나서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마음껏 가르쳐 주고 싶다. 이게 나의 무리한 욕심인지 물어보고 싶다, 누구에게든.


(김OO , 방과후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