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오 17,7)
어떤 청년과 논쟁을 했습니다. 그의 논지는 얼마 전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해야지, 비정규직이라고 혜택을 주면 되나요?” 함께 나눌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 친구에게 1,000만 비정규직 종사자가 겪는 아픔, 너도 비정규직이 될 수 있으니 특혜가 아닌 약자에 대한 보호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 친구에게 너무 복잡한 이야기이고, 그에게 절박한 것은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오늘날 세상은 과거와 비할 바 없이 규모가 거대해지고 복잡해진 세계적 네트워크를 이루기 때문에 여러 사회갈등 속에서 정의의 인과관계를 밝히기 어렵다고 합니다(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그래서일까요? 전 세계 수많은 이해관계가 조정되긴 매우 어려우며 사안을 축소·왜곡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쉬운 방법으로 흐르곤 합니다. 지구적 진실과 정의보다 이익에 의해 움직입니다. 아쉽게도 외면만 세계 공동체이지, 복음이 지향하는 온전한 공동체라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한국사회도 그러합니다. 금번 팬데믹은 사회 전반에 걸친 위기와 함께 갈등을 더 많이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합리적 대화보다 투쟁이 전면에 내세워지기도 합니다. 종전 이후 지속된 이데올로기와 지역, 진영의 대치는 개인의 만족을 기준으로 세대, 집단, 성별, 종교를 망라해 더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갈등이 해결되는 구조가 점점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위기와 갈등에 대한 해결 의지와 노력, 해법이 없다면 코로나는 공포와 함께 관계의 블록화와 차단, 사회적 분열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다음 세상의 모습은 회복되기 어려운 약육강식의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릅니다.
고용환경을 비롯해 사회 곳곳에서 어려움들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고조된 갈등과 위기만큼 해법도 절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해법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노력하는 것이며, 그 노력 중 하나는 산업화 이후 줄기차게 밀려났던 참된 종교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재물 숭배를 버리고 인간 존엄, 상생과 화합,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지향하는 참된 종교성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을 초라한 것으로 만들지 말고(reductionism) 공동선과 연대, 생명과 인간 존엄을 회복해야 합니다.

2013년 7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후 첫 외부 순방지로 이탈리아의 작은 섬 람페두사(Lampedusa)를 방문했습니다. 교황은 그 죽음의 바다에 헌화하고 그 속에서 숨져간 수많은 난민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또한 9월에는 사르데냐(Sardinia)를 찾아 그곳의 수많은 실업자들을 위로했습니다.(사르데냐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에는 비가 내리는 바티칸 광장에서 홀로 인류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혹자는 정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의는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만든 모호하고 어지러운 변명에 가려져 있을 뿐이죠. 그리고 교황이 보여주신 행동은 인간과 종교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디로 걸어가야 할지에 대한 성사적(聖事的) 상징입니다. 더 큰 위기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위기는 우리들 스스로가 헤쳐나가야 합니다. 스승의 부르심에 그물을 던지고 일어섰던 제자들처럼(마태 9,9) 우리도 숨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야 합니다. 위선과 거짓말, 무책임, 무관심과 변명, 이기적 욕심에서.
이주형 요한 신부. 노동사목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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