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에세이 2019-04]
엽락분본(葉落糞本)
잎이 떨어져 뿌리의 거름이 됩니다.
사람이 하는 일도 자연에 비추어 보면 잘된다고 자만할 일도 좀 뒤쳐진다고 불안해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듯 과정이 순환 반복되며 더디게 성장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마다 9월이면 내년을 준비하는 노동사목위원회 직원 연수를 진행합니다. 매년 갖는 연수이다 보니 거의 프로그램이 예상되게 마련이지요. 한해 활동을 평가하고 내년을 준비하는 정도의 일정들 말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좀 다른 연수를 준비해보고 싶었습니다. 2014년부터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우리 노동사목은 10년 안팎의 세월을 견디며 문제 해결을 바라는 노동자들과도 함께해야했고 새로운 프로그램도 시도해가며 내몰리듯 바쁘게 일 해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계속 마음에 품고 있던, 우리가 하는 노동사목이 과연 함께 일하는 구성원 모두가 같은 목표를 제대로 바라보고 가고 있는 중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막연하게 각자 생각하고 알고 있다고 믿는 노동사목의 방향과 비전이 정말 서로 같은 것일까 한번은 다 같이 서로의 생각을 꺼내놓고 펼쳐 놓은 다음, 우리가 선택하고 집중하고 구체화 할 대상이 무엇인지 합의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도와줄 코칭 선생님도 초대하여, 안에 있기에 익숙해서 보지 못했던 노동사목의 철학과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했습니다. 또한 기관의 설립 목적과 꼭 지키고 가야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법이 무엇인지 각자의 언어로 얘기하고 저마다의 관심사를 나누어, 유사한 것은 모으고 다른 것은 구분하며 핵심 키워드로 명료화 하는 작업을 온종일 진행했습니다. 그리하여 얻어 낸 우리 노동사목의 핵심가치는 ‘존엄한 노동자’, ‘양질의 노동’이었습니다. 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원칙들도 나열해 보았습니다. 나아가 2020년 우선 사목대상을 ①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미조직 노동자 ; 불안하지 않게 일할 권리 ② 일할 권리조차 없는 (청년, 장애인)실업자 ; 노동할 권리 ③ 요양보호사(감정노동) ; 건강권으로 정해 보았습니다.
2020년 노동사목위원회는 우리가 결정한 우선 사목대상을 위해 기도하며,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고 고민할 것이고 실현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해마다 푸르렀던 잎들이 다음을 기약하며 잎을 떨구어야(엽락 葉落) 비로소 보여 지는 가지와 같이, 바쁘고 분주한 일들에 가려져 있던 근본의 가치를 선명히 바라보려는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낙엽이 썩어 나무를 살리(분본 糞本)듯, 우리가 했던 많은 시도들과 활동들이 쌓여 노동사목이라는 나무를 튼튼하게 살릴 것이라 믿습니다.
박신안 베로니카
노동사목위원회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