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새 계약서 작성”…노동자 삶 쪼개버리는 ‘쪼개기 계약’
조경 노동자·대학병원 콜센터 상담원·우편집중국 우정실무원…
문 정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선포 후 1년 미만 초단기 계약 여전
“다음달엔 일자리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계약서가 갑질 무기”
정부, 공공부문 정규직화 1단계 77%…민간위탁기관은 사실상 손 놔
비정규직 없애겠다 했는데… 2017년 5월 인천공항공사 4층 CIP 라운지에서 열린 ‘찾아가는 대통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열겠습니다!’ 행사에서 한 참석자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발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 파견·용역직 노동자들은 정부 가이드라인 예외 조항 등 때문에 여전히 ‘쪼개기 계약’에 시달린다. 정규직 전환도 목표 달성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확인됐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아, 이번달도 안 잘리고 살아남았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의 꽃과 잔디를 가꾸는 조경노동자 ㄱ씨는 월말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올림픽공원 조경노동자 70명은 지난해 6월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자회사인 한국체육산업개발과 1개월짜리 계약을 매달 맺는다. 이전까지는 6개월 단위로 계약을 맺어왔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0)시대’ 약속을 한 뒤 되레 1개월로 기간이 줄었다. ㄱ씨는 다음달에는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지만 쉽게 불만을 토로하지 못한다. “계약서가 ‘갑질 무기’인 것 같아요. 조용히 지내고 열심히만 하라는 거예요. 마음에 안 들면 계약 끝내버리겠다는 식이죠.”
고용노동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연중 9개월 이상 상시지속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 대상이다. 한국체육산업개발은 비정규직 1000여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지만 올림픽공원 조경노동자들은 제외했다. 정부 가이드라인이 60세 이상 고령자와 청소·경비 등 일부 업종은 정규직 전환 예외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죄인지 참 야속해요. 대통령 약속을 믿고 정규직을 꿈꿨는데 1개월짜리 계약한 지 1년이 다 됐네요. 이제 희망을 안 가져요.”
문 대통령은 취임 사흘째인 2017년 5월12일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제로’를 약속했다. 만 2년이 지났다. 공공부문에서 ‘쪼개기 계약’은 사라지지 않았다. 쪼개기 계약이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피하려고 1년 미만의 초단기 계약을 맺는 것을 말한다. 예외 조항 때문에 기간제 노동자, 파견·용역직 노동자, 자회사·위탁기관 노동자는 초단기 계약을 이어가며 고용 불안에 시달린다. 2년 이상 일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기간제법이나 1년 이상 일하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 퇴직급여법 적용을 받지 못한다.
파견·용역직 노동자는 정규직 전환의 ‘사각지대’에 있다. 가이드라인은 전환심의위원회를 거치는 기간제 노동자와 달리 파견·용역직은 정규직 전환을 노사 협의에 맡겼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려면 사측의 반대를 뚫어야 한다. 지방의 한 국립대학병원 콜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원 ㄴ씨는 3개월, 6개월 단위로 용역업체와 계약을 맺는다. 원래 병원이 정규직이 맡던 업무였지만 2016년 10월부터 용역업체로 외주화됐다. ㄴ씨는 콜센터를 ‘최전선 부서’라고 했다. 상담원 10여명이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병원으로 걸려오는 모든 예약·상담 전화를 받는다. ㄴ씨는 입사할 때 ‘정년까지 일자리가 보장될 것’이라는 약속을 들었지만 계약서를 새로 쓸 때마다 불안하다.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수 있겠다고 기대하다가도 2년이 되니까 지쳐요. 계약종료가 다가오면 ‘잘리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은 어쩔 수 없어요.”
일부 기간제 노동자도 불안을 호소한다. 우정사업본부는 수시로 우정실무원의 ‘신규채용’과 ‘계약종료’를 반복한다. 서울의 한 우편집중국에서 일하는 기간제 우정실무원 ㄷ씨는 지난 4월부터 3개월짜리 계약을 맺어 일하고 있다. 우편물 분류 등 업무를 하며 최저임금을 받는다. ㄷ씨는 지난해 다른 우편집중국에서 10개월 일하다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유사·동일 업무가 연중 9개월 이상 이어지고 향후 2년 이상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정사업본부는 2년 이상 지속될 업무가 아니라며 전환해주지 않았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기간제에게는 보조금, 수당, 복지포인트 중 아무것도 해당사항이 없으니까 속상했어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도 선물을 기간제에게만 주지 않더라고요.”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화는 ‘용두사미’로 끝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2017년 7월 1단계 공공부문(중앙정부·자치단체·공공기관·지방공기업·국공립 교육기관) 대상 기관 853곳의 비정규직 41만5602명 중 18만1412명(43.6%)을 전환 결정했다. 전환 결정 인원 중 실제 전환 인원은 2019년 5월 현재 13만9536명(76.9%)이었다. 기간제는 7만444명 중 6만7028명(95.1%), 파견·용역직은 11만968명 중 7만2508명(65.3%)이 전환됐다.
정부는 2018년 5월 2단계 공공부문(자치단체 출연·출자기관, 공공기관 및 지방공기업 자회사)에서 발목을 잡혔다. 노동부는 대상 기관 600곳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규모를 1만5974명으로 파악했다. 기간제 1만1392명, 파견·용역직 4582명이다. 지난해 5월 전환 결정된 비정규직은 4221명(26.4%)에 불과했다. 실제 전환 인원은 5월 현재 기간제 3370명 중 2904명(86.1%), 파견·용역직 851명 중 668명(78.4%)이었다.
정부는 3단계 공공부문(일부 민간위탁기관)은 사실상 정규직 전환을 포기한 모습이다. 정부는 지난 2월 이낙연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민간위탁 업무를 남겨둔 채 노동 조건을 개선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민간위탁을 유지하는 게 적절한지 개별 공공기관이 스스로 검토하게 할 예정이다.
공성식 공공운수노조 정책국장은 “정부 가이드라인이 명확한 기준 없이 노사 협의에 맡겨놓으니 실효성 없이 시간만 흐르는 것”이라며 “기관에 ‘알아서 하라’고 하면 과연 정규직으로 전환할 곳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고 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민간위탁 업무는 1만개가 넘을 만큼 다양하고 파견·용역직은 기관별·업종별 특성이 제각각이라 정규직 전환의 일괄된 기준을 만들기 어렵다”며 “일반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뒤 노사 협의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독려하고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했다. 허진무·김희진 기자
* 출처 : 경향신문 2019. 6. 3
* 해당원문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030600035&code=940702
